빛과 색채의 화가 이현, 지중해의 빛
아티스트s
아티스트s

 >  MEDIA  >  REVIEW

  




제목 "이 현" -Costanzo Costantini 미술평론가, 이태리 2004 등록일 2005-03-29 00:00:00
작성자 관리자 파일명


이 현

-Costanzo Costantini(꼬스딴쬬 꼬스딴띠니 : Italy 미술평론가)


"이미지는 빛을 떠나 살수 없다."
-Fellini

'이 현과 빛'

이 현의 작품을 만날 때 처음 부딪치게 되는 것은 대기와 공간, 캔버스에서 내뿜고 있는 강한 빛이다.
이 빛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그것은 동양의 빛인가? Rainer Maria Rilke가 보았던, Balthus가 어렸을 적부터 매료되어 그리던 동양의 신비한 형상을 한 중국 등불의 바로 그 빛인가?
아니면 로마의 빛, 이탈리아 수도에 도착하여 자신의 청년기 때부터 뎃생과 커리커춰를 그리며 자신의 창작 세계를 꿈꾸며 모색하던 미래의 영화인 Fellini의 마음을 밝게 비춰주던 바로 그 빛인가?
“빛은 모든 것이다” 라고 로마의 Fellini는 말했다. 영화 언어는 회화 언어와 깊은 관계가 있다. 둘 모두에게 빛은 생명이다. 빛을 떠나 회화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빛은 특별하고 유일하다. 도시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16세기에 지어진 두 개의 건축물 사이의 빛,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빛만으로 충분하다.
이 현의 작품에 투사되고 있는 빛은 이 둘 모두이다. 이 빛은 동양의 빛이며 로마의 빛이다. 화가는 자신이 태어난 서울의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이 후 로마에 살며 로마 미술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녀 또한 로마의 빛에 사로잡혔다.
석양빛에 짙어지는 파랑과 초록, 불꽃의 빨강과 금의 노랑, 또는 성당의 왕자들의 망토에 어려 있는 보라와 자주의 로마의 빛에.
로마의 빛, 이탈리아의 빛, 지중해의 빛에.
중세시대부터 각 곳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14세기 교황 Bonifacio 8세에 의해 만들어진 첫 번째 쥬빌레오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어울렸고, 스스로 왕자들처럼 행동했으며 생에 대한 장대한 포부와 세계에 대한 예술적 비젼을 가졌다. 태양과 빛의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유럽과 세계 각 곳으로부터 꾸준히 이탈리아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소위 대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림과 조각을 했던 수많은 외국 예술가들에 대해 각 한 두 줄씩만 적는다 해도 예술사의 커다란 한 장이 될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뉴욕, 로스앤젤레스, 런던 파리 등지에서 다국적 다중적인 작업들이 나타나고 있듯이 예술 시스템에 대하여 오만하게 정석을 말할 수는 없지만, 로마는 아직도 지상의 다른 도시들에 울림을 준다. 오늘날 예술가는 세계의 시민이며, 이 현은 진정한 예술가이다.


“나는 현대미술을 사랑한다, 무엇보다 빛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 어떤 것보다 빛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불을 창조했다.”
- Apollinaire


이 현의 그림은 Maurizio Fagiolo dell'Arco가 이탈리아의 한 화가에 대하여 썼던 “빛 빛 빛이다” 라는 표현이 끝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빛 혹은 Lux ; 사전적으로는 두 세 개의 스펠링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단어지만 창세기 이후로 이 작은 단어는 그 신비함을 더해가고 있다. 물리학적으로 광자의 소분자, 전자기파의 포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신비함을 더한다. 빛은 볼 수 있게 해 주며, 회화는 시각학이라 불렸다. 그러나 빛은 자연과 인공, 낮과 밤, 현실과 정신, 물질적 혹은 비물질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빛의 종류는 무한하다. Bergman에게 “빛은 달콤하고, 위험하며, 꿈이고, 삶과 죽음, 맑음과 흐림, 따스함, 폭력, 나체이고, 갑작스러움, 어둠, 봄빛이며, 내부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세로로, 사선으로, 관능적으로, 낮음, 한정되어, 유해함으로, 화려하게 존재하는 것.” 이다. Leonardo에게 빛은 Turner에게와 마찬가지로 정신이다. Monet에게 있어 빛은 하루의 매 순간마다 변하고, 시각의 앵글과 색의 처리에 따라 달라지며, 인상주의 대가가 같은 주제를 수없이 반복해 그렸던 것도, 추상화에 이르게 했던 빛나는 선명함으로 이루어진 Ninfee의 작업도 다 옳다. 이 현의 그림에서 빛은 형이하학이며 형이상학이고, 현실과 정신, 물질과 영혼, 순수와 관능이며, 특히 햇살과 한낮의 눈부신 광선은 현혹적이다.


“색채는 사물의 형태며, 빛과 어둠의 언어다”
- Hoffmannsthal

'이 현과 색'

이 현은 빛 색채, 혹은 색채 빛이며, 이 절묘한 두 요소의 결합은 형태와 깊이, 움직임을 창조해 낸다. 그림은 색의 기본 요소 혹은 이 화가가 사용하고 있는 기본 색들, 즉 파랑, 빨강, 노랑, 흑과 백으로 이루어졌다. Fauves와 Matisse의 빛색채, 혹은 Mondrian이나 Van Doesburg의 빛 색채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 현의 빛 색채라 말하는 것이 옳다. 캔바스의 분할과 공간구성, 평면으로 사용된 색의 절제, 색채의 명쾌한 대비, 사물에 대한 시각적 개성은 De Stijl의 화가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 현은 현대미술의 대가들로부터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해 보여준다.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색 회화는 바로 최상의 채색이다” 라고 세잔은 말했다. “나와 색은 하나이다, 색은 우리의 지력과 우주가 만나는 지점이다” 라고 Paul Klee는 말했고, Turcato는 “회화는 색을 사용할 때 시작된다,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흑과 백, 모노크롬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1950~60년대에 다른 화가들이 그랬듯이, 이 현은 흑백, 흑의 모노크롬의 매력을 알며 그 것을 시각적으로 되돌린다. Tiziano와 de Chirico등 대가들이 사용했으며, 뿐만 아니라 Malevic와 러시아 아방가르드로부터, Burri 이전에 사용했던 흑. 누군가는 또 무채색을 선호한다. 이 현의 그것은 눈부시다, 더욱 눈부시다, “더없는 본질인 색, 그 것은 정신의 표현이다” 는 Odilon Redon과 “빛의 핵심”이라 표현했던 Mark Rothko의 정의 안에서 이와 동조를 이루며 이 현의 무채색 또한 눈부시다.

“현대 구상회화는 공간과의 투쟁이다, 공간을 지배하기 위하여”
- Heidegger


이 현은 공간의 감각을 완전히 지배한다, 원근의, 자유의, 무한의, 우주의 공간을. 하이데거는 공간에 대한 사랑은 자유에 대한 사랑과 같다고 주장했고, 바스크의 조각가 Chillida는 현재가 시간의 진정한 주인인 것과 같이 공간의 진정한 주인은 어떤 것에서 사물이 변화하는 그 지점이다 라고 말했다. 이 현은 말 한다; “나는, 나의 내부와 외부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그 공간 안에서 나의 감각이나 내면의 상에 부딪혀 오는 어떤 인상, 이미지들, 내가 지각할 수 있거나 인식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것들을 내 안에 껴안아 한 점 한 점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자 한다. 그리고, 논리나 이성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진솔하게 표현해 내는 그것이 심미적으로 어떤 가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하고 있는 작업, 즉 그림이란 나의 내부와 외부 세계, 나와 세계, 소우주와 대우주의 교감이며, 또한 그것은 순간순간의 이 두 세계의 강한 맞부딪힘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리라.”

“자연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예술을 통해 표현한다.”
- Picasso

'이 현과 자연'

이 현이 또 말하기를; “충만한 생명력을 그리고 싶다, 때 묻지 않은 처음의 모습들, 순결한 자연을” 그러나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자연주의적 회화가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비자연주의적 회화다. 자연적 요소들 -땅과 물, 하늘과 해, 달, 나무들, 생명들...-은 그녀의 붓 끝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며, 이는 예술 그 자체의 존재이다. “예술적”인 것일수록 더 자연적으로 보이며, 즉흥적인 것으로 보일수록 더욱 숙고하고 의도된 것이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더 많이 복잡하고 깊은 것이다. 이 현은 “단순성”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성은 “본질성”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Degas는 자신의 회화에 대하여 말했다; ”어떤 예술도 나의 것보다 덜 즉흥적이다”. 이 현의 경우 회화의 기본 요소들을 선택해 사용한다. 역으로, Huysmans의 말을 빌리자면 “자연은 예술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꽃을 피우지 못한다; 자연은 기본재료로 놓인다, 씨앗과 흙, 모태와 성분이 된다.나무를 재배하고, 형성하고, 그리고, 그것의 인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소설의 주인공, 데스 에쎈트, 생화를 본 딴 조화, 조화를 만드는 것으로 생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술을 모방하는 것이 자연인 것이다. Oscar Wilde에게 그랬듯이. 『거짓의 추락』 에서, 비비안은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하기 위해 창문 가까이 가기를 권유했던 친구에게 이야기한다 : “Tuner는 저급하다, 그의 좋지 않은 시기의 그림은 아주 저급한 것이다”. 비비안은 또 말한다 : “예술 -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진정한 완벽함을 쓴다. 예술을 유사성의 몇몇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술은 하나의 거울이라기보다는 베일이다. 어느 숲에서든 이름 모를 꽃들이 자라고, 어느 숲에서도 볼 수 없는 새들이 자라난다. 예술은 세계를 짓고 부수며, 진홍색 실로 하늘의 달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 겨울에 아몬드나무의 꽃을 피울 수 있으며, 익은 곡식 위로 눈을 내리게 할 수도 있다”. 이 현이 자신의 멋진 그림들 속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으며, 새로운 형태의 무생물과 생물을 차용할 수도,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색을 만들 수도, 같은 색채의 다른 뉘앙스를 줄 수도 있다. 예술가는 artifex이다. 또는 artificia의 창작자이고, 고금의 대가들에 의해 상징화된 관념에서 artificium을 의도한다. Francesco의 「삐에로」에서 Paolo Ucello까지, Degas에서 De Chirico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회화적 비범함의 놀라운 기교들, 혹은 빛과 색과 공간의, 형상과 공간 관계의, 빛과 어둠 사이, 충만과 결핍들의 관념과 상징을 새롭게 의도한다. 세잔의 지칠 줄 모르는 자연에 대한 찬양은 옳았다. 그러나 또한 그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며 창조다” 라고 말했다. 그는 르브르의 빛을 통해서 자연에 대해 알게 되었고,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은 수수께끼이다”
- Dostoevskj

'이 현과 아름다움'

이 현은 말 한다; “내가 만들고 표현해 내는 것들이 심미적으로 어떤 가치 있는 것이 되 기를 바란다. 나에게 미적인 것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진정함과 선함이다”. 동양에서 온 한 화가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운 생각이다. 이는 플라톤이 가졌던 이상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에서 미(kalos)는, "attrarre a se' -자신으로의 초대”라는 뜻으로, 지적 사회의 한 이념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이는 존재, 과학적 지식, 영원불멸과 무한생명이다. 미는 영혼 그 자체이고, 죽지않으며,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영생을 준다. 이는 의식으로써만 파악되며, 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지성에서 감성으로 넘어가야 된다. 여기에서 진(verus)은 선(bonus)과 동일시 된다; 이탈리아어로 미 bellus는 선 bonus과 동의어이며, 신그리스어로 kalos는 또한 선(agathos) 혹은 선(bonus)를 뜻한다. 그 이상으로 관념의 지성세계와 감성세계 사이를 중재하는 사랑의 신 Eros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판단할 수 있는 지적 존재이다. 에로스는 미의 운명이며 스스로 미를 향한 압력을 받는다. 감성세계의 미는 자신 안의 미 혹은 영원의 미에 조응한다. 여기에서 미 혹은 -진 선 미-의 이상은 자신의 의지로 그 가치의 변환과 파괴의 불신을 심판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현은 그것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아마도, 아름다운 청년 시절부터 감수성이 강한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우주세계의 조화를 예견하고 운명적으로, 예술을 모색하며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시작은 당연히 다른 시작과 결합한다. 그녀의 그것은 대단히 현대적이며 다른 것이다. 이 현은 선언한다; “나는 물이고 불이고 공기이며 빛이고 나는 모든 것이며 또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의 전체 세계 속에서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 아닌 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개체들 또한 서로 구별되어 독립적으로 존재되지 않는다. 하늘과 바람과 숲이 하늘과 바다와 새와 별이 서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과 공간도 내부와 외부도 생과 죽음도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현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름답고 난해하다. 그의 그림에서 중대한 요소가 되고 있는 빛-색채 -- 파랑, 노랑, 빨강, 백색과 회색, 노랑-파랑, 회색-파랑, 빨강-파랑, 백색-파랑, 파랑-녹색 -- 는 보는 사람에게 즐거운 기분을 준다. 삶의 기쁨을, 자유를 느끼게 하고, 예술 창작을 사랑하며 편력을 가진 이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활력을 더해주며, 순진무구한 Dostoevskj가 정의했던 그 미의 수수께끼는 관람자들의 감각과 직접적으로 교감한다..

Hokusai는 이미 50년 전에 “예술은 추상화 부문에서 동양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Chillida

'이 현과 형태'

구상과 추상 간에 별다른 차별성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Leonardo가 정의했던 것처럼 예술은 얼마나 “정신적인 것”인지, 예술은 언제나 다양한 크기로 추상과 또 다른 추상인 것이다. 형이상학적 회화는 Giorgio de Chirico에서 재구성되어 모든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Beato Angelico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관점에서 이 현의 그림은 더욱 추상화된 구상이다. 순색의 평면으로 크고 넓게 펼쳐진 그녀의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추상화되어 있다. 단색과 2채색. 3채색으로. 또한 주재와 나목들, 동물들, 마린 블루, 돛배, 하늘, 특별히 집들은 Kandinsky의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풍경들, 혹은 Paul Klee의 풍경들을 생각하게 한다. 몇 가지 점에서 구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그림들은 추상이다. 특히 여인들을 그린 그림, -- 「첼로와 누드」, 「창가의 여인」, 「피아노와 누드」, 「바이올린 연주하는 여인」 등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명쾌하고 강한 대비와 흑백으로 표시하고 다듬은 형태 -- 는 적게 사용된 기본 요소들로 이끌어낸 결과이며, 형상을 암시하는 윤곽선과 푸른 색 모자가 강조된 얼굴의 창백함 혹은 셔츠 등은 Modigliani와 현대작가들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적이다.

“나는 훨씬 현실적이지만 내가 그림으로 창작하는 것은
환영이다”
- Delaroix

이 현은 초현실주의 화가이며 시각예술가이고 요술사다. 그녀의 「가을의 환」 시리즈는 다시 증명해 보인다. 그녀에게 물질은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결국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에너지이다. 그녀가 땅과 물과 불, 부는 바람과, 근사한 교각들의 에너지를 자신과 동일시할 때, Einstein이 가르쳐준 바와 같이, 그것은 육체적 에너지, 정신적, 감성적, 영적, 우주적 에너지이다. Rolsaba Carriera와 Michelangelo Ricciolini의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네 개의 기본 요소들이 있다. 미래파 화가들은 이미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빛의 속도와 공간-시간의 시각적 부피의 해체에 대해 연구했다. 이 현의 그것을 말하자면 물질의 비물질화 혹은 “탈물질화”이다. Yves Klein는 블루에 빠져 그것에 몰두했다. Giotto로부터 Beato Angelico가, Poussin에서 Matisse와 Picasso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블루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했다. 이제 이 현의 차례이다. 50년대 말에 Yves Klein은 “감수성과 소멸 학파”에게 생명을 주었고, 같은 시기에 연작 시리즈 “Zona della sensibilita' pirorica immateriale"의 첫 번째 작품을 실현했다. 이 현은 이 학파에 속했을 법하다. 그녀의 블루는 그녀 이전에 다뤄졌던 대가들의 블루를 시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리기 원하는 ”영원한 것들“, 이 현의 블루는 천상의 영원성이다.

Costanzo Costantini(꼬스딴쬬 꼬스딴띠니 : Italy) / 미술 평론가 2004.


댓글등록
이름 패스워드
 
이전글 The Harmony of pure Artistica Form and Space
다음글 “이 현-자연에 대한 마음의 뉘앙스" -박영택(미술평론가/경기대교수)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