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색채의 화가 이현, 지중해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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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의 한국화가 이현 - 주간조선 등록일 2009-07-14 00:00:00
작성자 관리자 파일명

[Artist & Atelier] ⑨ 로마의 한국화가 이현
관념? 철학? 실험? 그림은 그냥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
순수회화 기법으로 밝은 풍경 담아… 로마서 '빛과 색채의 화가' 극찬
어릴 적 몸 약해 그림만 그리며 지내… 힘든 시절 겪고 나니 삶이 더 환해 보여
서울 안암동 로터리, 한 낡은 건물에 촌스러운 옛날 간판 하나가 있다. 못난 글씨체로 투박하고 커다랗게 쓰인 ‘화실’이라는 간판. 뭘까? 없어진 미술학원의 간판일까?

이 촌스러운 간판이 가리키는 곳은 사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손꼽히는 한국인 화가 이현(51)의 서울 작업실이다. 옛것을 좋아하는 이현은 30년 된 이 작업실을 그대로 쓴다. 물감도 캔버스도 액자 하는 가게도 30년 동안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 옛날 냄새 폴폴 나는 작업실 간판도 떼지 않고 그냥 뒀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말 과거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유럽의 어느 박물관 전시실 한편을 보는 것 같다. 오래된 가구, 악기, 책이 잔뜩 있다. 그리고 그 골동품들과 함께 이현의 환한 그림들이 놓여있다. 마침 100호짜리 캔버스에 가득 양떼를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포르투갈, 서울, 로마를 왔다 갔다 하는 그는 서울에 오면 여기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린다.


▲ photo 정복남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워낙 환한 그림을 그리셔서 ‘빛과 색채의 화가’라 불리시는데요. “어렸을 때 몸이 너무 약해서 의사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했대요. 그런데 신기하게 27살에 로마로 유학간 뒤부터 건강이 아주 좋아졌어요. 로마 기후가 저랑 맞았나 봐요. 아팠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우울하게 보냈는데 나이 들고 건강해지면서 비로소 삶이 너무 좋고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어요. 원래 어둠을 겪고 나면 빛이 더 환하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제 그림을 빛으로 채우는 것 같아요.”

이현은 27세에 이탈리아 로마로 갔고 국립 로마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5년째 그곳에서 활동하며 현지의 주류 무대에 섰다. 2004년에는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문화재단인 치니(CINI) 초대전과 파리 유네스코 본부 초대전을 했다. 작년 10월 주재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서 건국60주년 기념전으로 한 전시도 이현 개인전이었다.

왜 화가가 되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신 거죠. “어렸을 때 몸이 하도 약하니까 밖에 나가 놀지를 못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책 읽는 거랑 음악, 미술을 좋아했어요. 원래는 러시아문학과 독일철학을 좋아했는데 독일이나 러시아는 기후가 안 좋으니 유학을 가면 건강이 더 나빠질 것 같았어요. 음악도 좋아했지만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그런데 미술은 혼자 죽도록 싸우면 되는 것이고 아무도 안 만나도 되잖아요. 저랑 딱 맞는 예술이에요.”

그의 그림은 현실에서 볼 수는 있지만 보기 드문 풍경을 담고 있다. 새하얀 양떼가 풀밭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멀리서 해가 몰래 떠오르고 있다. 빨간 우산이 마치 양떼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작고 예쁜 집들이 달빛을 받으며 마을을 가득 뒤덮기도 한다. 미술평론가 고(故) 이일(1932~1997)은 이를 가리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고 교감하는 세계라고 했다. 그리고 이현의 그림이 구상화이면서도 추상화처럼 색, 선, 면을 간결하게 사용하는 독특한 화풍이라고 평했다. 이런 독특한 세계 덕분에 이현은 캔버스와 유화 물감이라는 구식 미술 재료를 가지고도 21세기 첨단 현대미술의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꼭 낙원 같은데, 실제 본 풍경을 그리신 건가요. “다 실제 본 거예요. 로마에서 어느 겨울 새벽 4시쯤엔가, 컴컴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밖에서 ‘우~’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가 보니 엄청난 양떼가 지나가고 있었어요. 살아있는 것들이 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게 너무 기뻤어요. ‘아,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허름한 양치기 할아버지가 그 양떼를 끌고 갔는데 잠시 후 다시 ‘우~’ 소리를 내면서 양떼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 양들이 돌아오니까 마침 하늘이 밝아졌어요. ‘아, 얘들이 아침을 열러 갔다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림 제목을 ‘양떼, 아침을 열다’로 지은 거예요. 저는 나중에 제가 세상과 헤어지고 나면 제일 그리울 풍경을 그려요.”


▲ 1. 양떼, 아침을 열다. 2005 / 2. 어떤 기억 혹은 환. 2005 / 3. 어떤 기억 혹은 환. 1995 / 4. 가을의 환. 1995


▲ 드럼 치는 이현씨.
유화로 그리는 풍경화라, 현대미술에서 이제 이런 것은 멀리하는 것 같은데요. “20세기 내내 미술이란 이름으로 온갖 실험이 다 행해졌어요. 그 끝에 결국 뭐가 남았나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다는 결론이었어요. 저는 거기에 반감이 있어요. 특히 어설픈 관념을 바탕으로 하는 유희, 이미 미술의 역사 속에서 실험했던 관념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예술, 전 그런 거 너무 싫어요. 저 역시 어려서 책만 읽어 관념적이었어요. 웬만한 철학책은 다 읽었죠. 하지만 관념의 벽을 높이 쌓은 뒤 그걸 다 부수니까 비로소 이런 작업이 나오게 됐어요.”

선생님 그림을 두고 단순하고 순수하다는 평을 많이 합니다. “저는 단순하고 명쾌한 것들을 좋아해요. 미술이 뭘까요? 현실과 똑같이 그리는 것은 사진이고, 관념과 개념을 표현하는 것은 철학이에요. 저는 그냥 미술을 하고 싶어요. 캔버스, 유화, 붓으로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회화의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가능한 한 단순하고 순수하며 명쾌한 선과 면, 색채들만을 가지고 절제해서 쓰고 싶어요.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와 조형원리만을 써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 싶어요.”

단순하기를 원했던 이현의 소망은 ‘복잡’을 지향한 현대미술가들을 보란 듯이 잠재웠다. 파리 제1대학 미학 교수인 미술평론가 피에르 프레노-드뤼엘은 이현의 그림을 보고 “망막예술(‘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미술’이라는 뜻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그림을 비난하는 말)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즐거움은 화가를 황폐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평했다.

이현의 그림처럼 이현이라는 사람도 단순하고 순수하다. ‘예술가’ 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흔히 떠오르는, 그림밖에 모르는 순진한 사람의 모습을 그는 가지고 있다. 예술이 세상을 살린다는 믿음으로 거기에만 매달려 산다.

예술가로 사는 것이 좋으세요. “힘들지만 그만큼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인류는 예술이 없었으면 너무 사악하거나 너무 똑똑해서 멸망했을 거라는 말이 있어요. 다행히 예술이 있어서 인간의 위험성과 피폐함이 극복된 것이지요. 저는 아티스트가 인류 정신의 등불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 등불이 흐려지거나 맑지 못하면 안되겠지요. 유럽이 저랑 맞는 게 그 부분이에요. 아티스트는 예술을 위해 세속과 돈을 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까, 아티스트가 예술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분위기니까 그걸 인정해줘요. 그래서 제가 견딜 수 있었어요.”

이탈리아 현지 언론과 평론가들의 평을 많이 받으셨는데 ‘그림은 이현을 위해 존재한다’는 평도 있더군요. “제가 살아있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나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과 모든 능력을 다해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껴안고 표현해 내는 일, 그게 그림이고 제 삶의 의미예요. 그림 그리는 것은 살아있는 날 동안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며 동시에 고통이에요.”

예술이 사람과 세상을 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실 때가 있나요. “평범한 사람들과 그림을 통해 가슴속 깊은 정서를 나눌 때 행복해요. 2년 전 서울에서 전시를 할 때 아주 수수한 차림의 노부부가 장애 있는 딸과 함께 전시장에 오셨어요. 결혼 30주년을 기념해 여행을 가려고 돈을 모았는데 대신 그 돈으로 제 그림을 사서 딸에게 주고 싶다는 거예요. 노란색 양떼 그림이었어요. 오랫동안 모은 돈을 내고 그림을 사가면서 너무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작가로서 살기를 잘했구나, 그림 그리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이 들면서 행복했어요. 저는 제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 휴식, 영원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시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로마는, 더욱이 25년 전 로마는 정말 낯선 곳이었을 텐데 그곳에서 한국인 화가로 살기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제가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로마 덕분이에요. 오로지 그림만 보고 나를 평가해주고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한테 많은 것을 베풀어 준 나라예요. 저는 정말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제가 받은 것을 세상에 되돌려 주고 싶어요. 이를테면 제가 평생 그림에 빠져 사느라 못한 것이 있죠.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못 낳은 거. 그 대신 마지막에는 평생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가난한 나라의 굶는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어요.”


| 이 현 | “강렬한 색상이 세상의 고요함을 일깨운다. 시야를 넓게 하고 무한의 세계로 날아오르게 한다.”(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이현의 작품들은 다른 기존의 특징 양식들로부터 해방돼 있다. 색채와 형태의 절제된 표현은 부드럽고도 달콤한 영혼의 시가 된다.” (이탈리아 미술평론가 젠나로 코비엘로)


/ 이규현 아트저널리스트 artky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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